소련의 최초이자 마지막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냉전시대를 끝내고 러시아의 민주화에 기여한 개혁과 개방의 주창자 고르바초프. 그는 1931년, 러시아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블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0년 모스크바 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 1952년 공산당에 입당해 교내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의 조직원으로 활약했다.
5년 간의 대학 과정을 마치고 1955년 고향 스타브로폴로 돌아와 콤소몰 서기 1968년 지구당 제 1서기를 거쳐 197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78년 농업담당 당서기, 1980년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고, 안드로포프가 집권하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며 체르넨코의 집권기간 중에도 2인자의 위치를 굳혔다.
1985년 3월 체르넨코의 사망으로 당 서기장에 선출되자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여 소련 국내에서의 개혁과 개방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개혁 등 세계질서에도 큰 변혁을 가져오게 했다.
1988년 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을 겸하고, 1990년 3월 소련 최초의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91년 7월 마르크스-리닌주의 및 계급 투쟁을 수정하는 소련 공산당의 새 강령을 마련했다. 이와 같은 개혁의지는 1991년 8월 보수 강경파에 의한 쿠데타를 유발시켰다.
크림반도의 여름별장에 머물고 있던 고르바초프는 연금 상태에서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사임 압력을 받았다. 그때 보리스 옐친 러시아 연방공화국 대통령과 소프차크 레닌그라드 시장 등 개혁파 인사들은 러시아공화국 의사당에 집결,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쿠데타 세력을 궁지로 몰아 넣었고 ,80만의 시민이 소련 전역에서 반쿠데타 시위를 벌였다.
21일 새벽 의사당에 대한 공격이 다섯 명의 사망자를 낸 채 실패한 뒤, 강경보수파의 쿠데타는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쿠데타 붕괴 후, 보리스 옐친 등의 주도로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연합이 탄생하자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92년에 국제환경보호운동과 전쟁난민 아동구호사업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고르바초프재단을 설립했고 1993년 설립된 국제 환경비정부기구 그린크로스 인터내셔널의 초대 총장을 맡았다.
계속 환경운동에 앞장서 2007년에는 (타임)에서 선정한 '45인의 환경 영웅'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서방국가에선 냉전시대를 종식시킨 훌륭한 인물로 평가하고,(타임)지는 '20세기 중요한 인물 100명'에 선정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인기가 없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가 모든 면에서 미국과 국력 차이가 벌어지자'위대하고 강한 소련을 붕괴시킨 지도자'로 평가절하하는 목소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