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 재상 "게르만의 영웅" 오토 폰 비스마르크
'게르만의 영웅'. '독일 제국의 건설자','철혈재상'으로 역사에 획을 그은 정치가 비스마르크
그는 1815년 프로이센의 쇤하우젠에서 지방 귀족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젊었을 때 그는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셰익스피어와 바이런의 시를 좋아했다. 괴팅겐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이후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1847년 프로이센 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했다.
1848년 베를린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반혁명파로 활동했고, 185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 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로 참석, 이때부터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를 배제해야 한다'는 '소 독일주의' 통일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어학 능력이 탁월하여 9개 국어를 구사했으며, 러시아 주재 대사와 프랑스 주재 대사를 거치면서 국제적 외교 감각을 지닌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독일은 중세 이래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서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차지 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크고 작은 연방국가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도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면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각국의 시달림을 받아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1861년 프러시아 왕위에 오른 빌헬름 1세가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임명해 정치를 맡겼다. 수상에 취임한 비스마르크는 군비 증강과 외교 문제를 내세우며 독일 통일을 주창했다. 비스마르크는 1862년 9월 독일 의회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은 철과 혈 밖에 없습니다. "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다.
그 후 제국통일을 위해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비 확장을 추진하여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의 승리로 군비 확장의 성과를 과시했다. 의회와도 화해하여 소독일주의에 의한 독일 통일의 기초를 굳게 하고, 1870년부터, 1871년까지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1871년 2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를 독일 제국의 황제로 하는 대관식을 올린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도 독일 수상이 되어 강국 독일의 기반을 다진다. 1888년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스물아홉살의 혈기왕성한 빌헬름 2세가 새로 제위에 즉위했다. 1890년, 빌헬름 2세와의 불화로 28년 간 투신했던 수상직을 사임하게 된다.
정계 은퇴 후 비스마르크는 바르친과 함부르크 인근의 프리드리히스루에서 지냈다. 이 시기 수많은 방문객들이 비스마르크를 찾아가 경의를 표하면서 그를 '게르만의 영웅'으로 불렀다. 방문객들의 이러한 찬사는 1895년 4월 비스마르크가 80회 생일을 맞았을 때 절정을 이루었다. 450개 이상의 도시들이 비스마르크에게 명예시민증을 주었고 9,875통의 전보와 45만 통의 편지가 3월 25일부터 4월2일 까지 비스마르크에게 전달 되었다.
아울러 그는 수많은 연회에서 축하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1890년 10월부터 약 2년 간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1896년 그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1898년 7월 30일 오후 11시에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