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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평민' 글래드스턴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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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평민'글래드스턴 수상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백만장자 무역상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튼을 나와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한 글래드스턴은 1831년 동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재학 시절에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23세에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상무장관, 식민지 장관, 재무장관, 등을 역임하는 동안 자유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관세개혁을 단행하고, 곡물법 철폐에 찬성했으며, 상속세 설치와 소득세 감소에 따른 예산안을 제출하는 등 자유주의자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나이 59세인 1867년 자유당의 당수가 돼 1868년 ~189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모두 17년 동안이나 수상을 역임하며 자유당 내각을 이끌었다. 그가 85세 되던 1894년 상원에서 자신이 제출한 군사비 증액 법안을 거부하자 수상직을 은퇴했다. 수상에서 물러난 사람에게는 작위를 부여하는 영국 전통에 따라 왕실에서는 그에게 작위를 내렸지만 거절했다. 비록 수상을 지냈지만 평민으로 남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글래드스턴에게 '백작'보다 더 값진' 위대한 평민'이라는 칭호를 헌사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글래드스턴은 연구와 연설로 여생을 보내고, 1898년 하워든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웨스트 민스터 성당에 안치되었다. 

 

글래드스턴은 처칠과 함께 가장 위대한 영국의 수상이며, 웅변가로 평가받고 있다. 스피치는 정치인에게 중요한 필수 능력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첫 연설은 시금석이다. 

 

 

글래드스턴은 1833년 6월 3일에 하원에서 첫 연설을 했는데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첫 연설은 환영받을 것이 관례지만 그의 첫 연설은 관례를 뛰어넘어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여당 휘그당 소속 원내총무도 국왕 윌리엄4세에게 전도유망한 의원으로 그래드스턴을 추천했으며, 윌리엄 4세는 "그와 같이 미래가 기대되는 의원이 진출한 것은 기쁜 일이다" 했다. 

 

글래드스턴은 목소리에 깊이가 있고 어조의 변화에 풍부하며 단상의 태도도 능숙했다. 그 몸짓은 호방하면서도 자연스러웠고, 난폭하거나 과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아 연설가로 선천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단한 노력과 지식이 없으면 대연설가는 될 수 없다"는 키케로의 명언을 가슴에 새기고, 2만여 권의 책을 독파하여 풍부한 지식을 갖추었고, 변론술 연마에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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