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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개혁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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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개혁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

 

 

'반노예제도운도의 선구자' , ' 숭고한 영웅',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리며 2008년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 윌리엄 윌버포스 , 그는 1759년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주위 사람들의 환영과 부러움을 받으며 오락과 유흥을 즐기면서 화려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21세인 1780년에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했다. 윌버포스는 의원이 된 후 많은 정치단체와 사교클럽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목소리와 뛰어난 웅변술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면서 점점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그는 강한 양심의 힘을 느끼고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1787년 10월 28일,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요약해놓았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커다란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근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고의 해군력으로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마구 잡아들여 북미 대륙으로 보내는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 영국 경제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0만 파운드를 벌어들이고 있었던 노예무역으로 연간 5,500명의 선원이 일자리를 얻었고, 그 고용 효과는 16만 톤의 선박과 그에 비례한 수의 선원들이 취업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와중에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다는 것은 국가 경제를 위축하는 반국가적 행동으로, 계란으로 바위치기 이며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이고 건드려서도 안되는 것이다. 기득권자들 즉 거대 상인, 재벌, 식민지 세력,왕족과 귀족들은 노예무역 반대를 매국으로 몰아붙였으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살해 위협까지 서슴지 않았다. 

 

 

글나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투철한 집념으로 '영국이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제도를 고집하는 이상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없다'고 경고하며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했고, 150번의 대의회 논쟁을 통해서 끈질기게 의원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1806년 영국 의회는 마침내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통과시킨다. 장장 20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였다. 법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그는 노예제 자체를 없애기 위한 활동을 계속해나간다. 그리고 1833년, 영국 의회는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윌버포스는 법안이 통과되고 난 사흘 뒤,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고, 웨스트미스트 사원에 안치되었다. 그는 부패한 영국에 경종을 울렸고 빅토리아 시대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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