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삼니움 전쟁

반응형

 

삼니움 전쟁

 

 

제 1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343~기원전341) 

호전적인 삼니움족은 대체로 남아펜니노 산맥에 걸쳐 있는 오늘날 이탈리아의 아브루초 지역을 차지하고 살았으며 기원전 4세기부터 영토 확장에 나섰다. 삼니움족과 로마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첫 번째 대결은 기원전 343년 라틴 동맹의 도시 카푸아가 삼니움족에 맞서기 위해 로마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로마 군대는 기원전 342년 가우루스 산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폭동이 일어나고 큰 손실을 입으면서 로마의 지원은 전반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기원전 341) 캄파니아의 여러 도시가 삼니움족에게 넘어갔고, 이 때문에 로마 공화국이 결성한 동맹체인 라틴 동맹의 회원국들은 크게 분노했다. 캄파니아의 대부분은 로마의 보호를 받게 됐다.

제 2차 삼니움족은 나폴리를 장악하려는 투쟁에서 한 파벌을 지원했다. 

 

로마가 나폴리를 포위했으며, 도시를 지키던 사니움족은 설득당하여 떠났고, 나폴리는 로마의 동맹국이 됐다. 이 일로 전쟁이 재개됐다. 산악지대에서 더 잘 싸웠던 사니움족은 기원전 321년 카우디움 갈림길이라고 부르는 아페니노 산맥의 좁은 고갯길로 로마 군대를 몰아넣고 항복을 받아냈다. 

 

로마인들은 멍에를 메고 행진하는 잊지 못할 치욕을 당했다. 그 뒤 로마는 군대를 개편하고 산악 전투에 더 적합한 군사작전을 채택했다. 기원전 317년 전투가 재개됐고, 이듬해 삼니움족은 라울툴라이 전투에서 다시 승리했다. 그러나 로마는 빠르게 회복하여 키우나에서 중요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기원전 315) 삼니움족을 캄파니아에서 내쫓아 수세에 몰아넣고 잃은 영토를 되찾았다. 

 

 

로마는 삼니움 주변에 식민지도 건설하여 요새이자 공격 기지로 사용했으며, 우기에도 확실하게 통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로마에서 카푸아에 이르는 포장도로인 아피아 가도를 건설했다. 삼니움족은 북쪽 에트루리아인의 도시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나 에트루리아인들은 바디모 호수 전투에서 로마에 패했고(기원전310)평화조약을 체결해야 했다.(기원전308). 그러자 삼니움족은 아펜니노 산맥 중부에 있는 부족들에게 로마와 맺은 동맹에서 이탈하라고 권고했으나, 이 부족들도 로마에 굴복했다. 

삼니움족과 남은 동맹 부족들은 보비아눔 전투에서 패한 뒤(기원전 305) 기원전 304년에 평화조약에 동의했다.

 

제3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298~기원전 290) 삼니움족이 갈리아인과 에트루리아인, 사비니족과 동맹하여 북쪽으로 팽창하려는 로마를 저지하고 로마의 변경 지역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에트루리아인과 갈리아인, 삼니움족의 연합군은 아드리아 해 인근의 센티눔(오늘날의 사소페라토 인근)에서 로마 군대와 대적했으나 기원전 295년에 대패했다.

 

그 뒤 삼니움족을 제외한 부족들은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로마는 삼니움족의 영토를 체계적으로 약탈했으며 아퀼로니아 전투에서 삼니움족을 격파했다.(기원전 293) 결국 기원전 290년에 삼니움족은 강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삼니움족은 용맹함을 인정받아 속국이 아니라 동맹국의 지위를 얻었다. 이탈리아 반도는 이제 로마가 지배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