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기회주의자 장제스
장세스의 외모는 마오쩌둥과 상당히 달랐다. 그는 서구식 군복일 입고 꼿꼿이 몸을 폈으며, 대단히 세련되고 자기 절제력이 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제 1차 국공 내전 당시, 장제스는 미국 언론과 정부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미국은 다루기 어려운 마오쩌둥의 공산주의보다 장제스가 미국의 이익을 훨씬 잘 대변 하리라 생각했다.
언론은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이나 상하이의 기생들과 얽힌 주색잡기, 쑨원이 사망하자마자 쑨원의 아내 쑹칭링에게 청혼한 기회주의적인 면모등은 공개하지 않았다. 쑹칭링이 청혼을 거절하자 장제스는 그녀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쑨원의 동서가 되었다.
이런 무자비한 기회주의적 태도가 장제스를 높이 끌어올렸으나, 마지막에는 자신의 무덤을 파게 했다. 그는 1887년 동쪽 해안가 저장성에서 소금 가게를 하는 부모 아래 태어났지만, 자신이 귀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오만하고 지배적이고 무모했던 그는 언제나 세간의 시선 중심에 서야 만족했다. 한번은 내기 때문에 커다란 물병에 머리를 집어 넣었다가 익사할 뻔한 적도 있다.
열여섯 살에 마을을 떠나 주도에 있는 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청나라의 압제로부터 중국을 해방한다는 혁명 사상에 고취되었다. 1905년, 장제스 황실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긴 변발을 자르고 일본으로 가서 군사 학교에 입학했다.
1911년에 귀국해 포병 중대장으로 임명된 장제스는 쑨원이 청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쑨원이 세운 새 공화국을 빼앗으려는 자들에 맞서며 주요 인사로 떠올랐다. 쑨원이 죽자 장제스는 정적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정적 중 한 사람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장제스의 총에 맞아 죽었다.
국민당 지도자가 된 장제스는 잠시 공산당과 국공 합작을 이루었지만,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해 선제공격하기로 했다. 그리고 암흑가 세력과 결탁해 1927년 상하이에서 중국 노동조합원들을 검거해 수천 명을 살해함으로써 내전의 불을 댕겼다.
이후 몇 년간 장제스는 전장에 직접 나가지는 않았다. 국민당군은 몇 번이나 공산당을 쓸어버리기 직전까지 갔으나 공산당은 매번 빠져나갔고, 중국 인민의 마음은 점차 마오쩌둥쪽으로 넘어갔다.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가르침 덕분이라기보다는 국민당군이 너무나 타락한 데다 장제스 자신도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해서 그들의 꼭두각시로 보인 탓이었다.
결국,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조차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장제스 정부의 타락상과 음모 그리고 그의 '민주주의' 국민당이 사실은 사사로운 권력 유지 도구일 뿐이었음을 미국이 알아차린 것이다.
장제스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약 200만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타이완으로 가 중화민국을 선포했다. 장제스는 그곳에서 길고 불편한 망명 생활을 했지만, 냉전 덕택에 서구 국가들로부터 진정한 중국 정부로 인정받았다. 그는 1975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에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과 악수하며 양국 간 관계의 물꼬를 트는 첫 장면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