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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공격성 에리히 루덴도르프(원더우먼 실제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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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공격성 에리히 루덴도르프

 

 

1865년에 태어난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타넨베르크 전투 때 파울 폰 힌덴 부르크 육군 원수의 보좌관 이었다. 그러나 보좌관이니 병참감이니 하는 지위는 모두 독일군에서 루덴도르프의 가치를 흐리게 하는 것일 뿐이었다. 

전통적으로 독일군에서 지휘권을 가지는 사람은 대부분 귀족인 '폰' 출신이었다. 그러나 루덴도르프는 제 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폰이 아니라 부르주아 출신이었고, 이 때문에 승진이 어려웠다. 

 

그는 일리노이에서 유배 생활을 한 율리시스 S. 그랜트와 비슷하게 전쟁이 시작되자 추운 산업 도시 뒤셀도르프의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연줄을 통해 독일 제2군 부사령관 자리를 얻었고, 그 후 브뤼셀을 공격했다. 

 

 

임무를 열정적으로 수행한 루덴도르프는 동 프로이센의 독일 제 8군에 합류했고, 그 직후 침공해 온 러시아군과 잠시 맞서게 되었다. 루덴도르프는 이곳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의 보좌관이 되었고, 두 사람은 완벽한 짝을 이루었다. 

 

귀족 출신인 힌덴부르크는 영리하지는 않아도 성품이 훌륭한 사람이었다. 반면, 루덴도르프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평화를 그저 '전쟁 사이의 막간극'이라고 할 정도로 지나치게 공격적인 면이 있었다. 타넨 베르크에서 러시아 제 2군을 물리칠 계획을 세운 것은 아마도 루덴도르프였겠지만, 어쨌든 두 남자는 타넨베르크를 비롯한 동부 전선에서 승전고를 울리며 유명해졌다. 

 

힌덴부르크는 1916년 에리히 폰 팔켄하인장군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루데노르프와 다른 장군들 그리고 용맹한 민간인 지도자들과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제와 의회의 간섭 없이 나라를 이끌 '제 3차 최고 위원히 '를 결성했다. 

 

 

구덴도르프는 이 같은 권력의 뒷받침으로 서부 전선에서 돌파구를 만들 재량권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 그의 공격적인 성향이 문제를 일으켰다. 1917년 가을, 러시아군이 화평을 청하고, 이탈리아군이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배한 후 루덴도르프는 연합국에 평화 조약을 맺자고 설득할 만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18년 초봄, 그는 일명 '루덴도르프 공세'를 시작하여 서부 전선에서 40마일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물자와 병력의 부족, 독감 등으로 수많은 독일 병사를 고생만 시키고 전진을 멈추어야 했다. 

 

11월, 독일 정부가 무너지자 루덴도르프는 스웨덴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그는 독일군이 좌익 정치인들에게 배반당했다는 내용으로 책과 기사를 여러 편 썼다. 1928년 독일로 돌아온 루덴도르프는 나치스의 간판 인사가 되었고, 독일 의회 의원이 되었으며, 뮌헨 반란에 참여했다. 루덴도르프는 전쟁에서 진 것이 자신의 맹목적인 공격성 때문이 아니라 신념 없는 정치인들의 배신 때문이라고 계속 주장하다가 1937년데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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