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사파타!에밀리아노 사파타
북쪽에 비야가 있었다면, 멕시코 남쪽에는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있었다. 강력한 지도자 였던 사파타는 1979년 멕시코시티에서 남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작은 주 모렐로스에서 태어났다. 비야가 가난하게 태어났다면, 사파타는 가난한 데다 인디언과 백인 혼혈인 '메스티소'로 태어나 더욱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메스티소가 멕시코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인종 차별의 희새양으로 경멸과 멸시를 당했다.
그러니 사파타가 사무친 분노를 품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를 찍은 사진만 봐도 그 검고 의심 가득한 눈에서 뿜어 나오는 한결같은 분노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게다가 사파타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사탕수수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렐로스에 철로가 놓일 때, 이아스의 법에 따라 부유한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말았다.
열여섯 살 무렵, 사파타는 디아스와 지배 계층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 그 맹세는 1906년 떠돌이 책장수가 그의 마을에 들른 뒤로 차츰 구체적인 윤곽을 나타냈다. 사파타는 그 책장수로부터 러시아의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이론을 배우면서, 점차 자신을 혁명가로 여기기 시작했다.
28세에 마을 촌장이 된 사파타는 법적 절차를 통해 농민들이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자 무장 농민 집단을 조직해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때는 1910년이었고, 전쟁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사파타가 '남부의 해방군'이라고 부른 농민군은 비야의 강인한 산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사파타는 자신과 농민군을 지배 계층을 타파할 진정한 혁명가로 여겼고, 절대로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농민 부대는 "비바 사파타!"를 외치며 북쪽으로 진군하고 눈에 띄는대로 부자들을 죽였다. 사실,사파타의 군대는 비야와 마데로에 앞서 가장 먼저 멕시코시티에 들어선 부대였다.
하지만 사파타는 정부나 권력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대통령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마데로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토지 개혁 약속을 받아냈고, 개혁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자 그를 상대로 투쟁하기 시작했다. 타협을 몰랐던 사파타는 북쪽의 자연스러운 동맹군 비야와 힘을 합칠 기회를 놓쳤다. 타협을 원하지 않은 데다 비야의 물질주의적인 면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양측 군대가 함께 멕시코시티로 향하자 카란사와 오브레곤은 도망쳤고, 비야는 사파타를 대통령 궁으로 데려가 대통령의 의자에 앉아 볼 것을 제의했다. 사파타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이 자리를 얻으려고 싸운 게 아니라 땅을 돌려받기 위해 싸운 것이오, 이 의자를 태워 버립시다." 비야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었다.
그때, 사파타의 강력한 혁명 이상과 비야의 강한 군사력을 합칠 수만 있었다면 , 그들은 그자리에서 혁명을 완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 갈라졌고, 사파타는 남쪽으로 가서 전투를 계속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농민군은 소모전으로 희생되어 점점 줄어들었다.
1919년, 카란사는 사파타의 가장 뛰어난 장교 한 사람을 변절하게 해 사파타를 포함한 군대 전체를 함정으로 끌어들였다. 사파타가 변절한 장교의 주둔지에 들렀을 때, 의장병들이 총을 들어 올렸는데, 이는 마치 위대한 반군 지도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공포탄 대신 실탄으로 사파타를 쏘아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