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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켄타우루스 판초 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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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켄타우루스 판초 비야

 

 

멕시코 혁명에서 권력을 다툰 인물은 한둘이 아니다. 그들은 제각기 다양한 공을 세웠지만, 결국에는 대부분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비견할 데 없는 뛰어난 승마술로 '북쪽의 켄타우루스'라는 별명을 얻은 반군 지도자 판초비야는 별명만큼이나 신화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단, 비야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신화적인 허구와 사실을 잘 구분해야 한다. 

비야는 1878년 멕시코 중부 두랑고 주의 가난한 소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도로테오 아랑고였으며,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사망했다. 형제들은 모두 부유한 지주 가족인 네그레테 가문에서 노예처럼 일했다. 

 

도로테오가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밖에 나갔다가 집에 왔더니 네그레테 집안 사람 하나가 누이를 강간하려 하고 있었다. 도로테오는 그를 쏘아 죽였다고 한다. 또 다른 버전의 이야기에서는 도로테오가 그레게 상처만 입였을 뿐이이라고도 한다. 어쨋든 도로테오는 험준한 시에라마드레 산맥으로 도망쳐야만 했고, 그곳에서 산적이 되었다. 

 

 

그는 외할머니의 성을 따서 판초 비야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경찰에 계속 쫓기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을 하던 비야는 이그나시오 파라가 이끄는 큰 산적 무리에 합류한 뒤로 부유한 광산주와 지주들을 습격했다. 

비야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로빈 후드' 스타일로 각색되었지만, 실제로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를 나누어 주지 않고 대부분 산간 지역 마을의 술집에서 재산을 탕진했다. 

 

멕시코 혁명이 발발할 무렵 비야는 아브라함 곤잘레스를 만나게 되었다. 비야는 이 거칠고 잘생기고 낙천적인 청년에게서 뭔가를 발견한것 같았다. 그는 마데로의 부대에 합류해 북부 멕시코에서 포르피리오디아스에 맞서며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후 멕시코 북부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비야가  디아스의 군대를 공격해 승리를 거머쥐었는데,마침 미국 기자들과 뉴스 카메라가 이 전투를 기록하며 전설이 탄생했다. 비야는 기자들에게 아주 근사한 소재였다. 32세의 건장한 몸과 검은 고수머리, 최면을 거는 듯한 갈색 눈, 게다가 날렵한 동작은 늑대나 쿠거 같은 야생 동물을 떠올리게 했다. 

 

 

비야는 대단히 유쾌해하다가도 바로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변하곤 했다. 현대의 몇몇 정신 분석가는 그가 조울증 환자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용감함의 대명사였던 비야는 한편으로 여자들을 강간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그가 여자들을 납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야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듯 '치안 판사'앞에서 가짜'결혼식'을 했다.

 

비야가 잘 싸운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현명하지 않았다. 사파타와 동맹을 공고히 하지 못한 탓에 오브레곤과 카란사를 이길 기회를 잃은것도 그렇지만, 미국 영토에 침입하여 미국을 자극한 일은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비야는 자기가 원하는 것만 쫓는 남자였고, 그를 따르는 민중을 사랑했지만 혁명가인 동시에 산적이었다.

마지막에 가서 재앙의 조짐을 알아챈 비야는 더는 오브레곤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화 10만 달러와 멕시코 북부에 있는 광대한 토지를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언론은 비야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4만명 정도는 불러 모을 수 있다는 식으로 떠들어 댔고, 비야를 견제하느라 편집증 수준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오브레곤은 점차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비야의 약속 역시 무의미한 것이기는 했지만, 오브레곤은 1923년 7월에 근처 마을로 정부를 만나러 간 비야에게 저격수들을 보냈다. 비야는 차를 몰고 가다가 총에 맞았고, 혁명가보다는 산적에게 걸맞은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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