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움과 친화적인 태조 이성계의 성품
"태조 이성계는 엄중하고 말수가 적고 신중하여 평시에는 항상 눈을 감고 앉아 있었으므로 바라보기에 두려웠으나 사람을 대하게 되면 혼연히 한 덩어리의 온화한 기운으로 화합하였기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다.
이 구절은 (용비어천가)에서 이성계의 성품을 표현한 부분이다.
이 내용으로 보자면 이성계는 평소에 말이 별로 없어 근엄하고 신중한 느낌을 주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매우 친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용비어천가)는 세종 때 만들어진 책으로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로부터 태종에 이르는 여섯 조상의 행적을 찬미하는 서사시다.
이성계는 (용비어천가)의 표현대로 말이 많지 않고 신중했으며, 되도록 적을 만들지 않고 화합을 좋아하는 너그럽고 친화적인 성품이었을것이다. 이런 성품은 신하와 부하를 대하는 데는 포용의 리더십으로 승화된다. 실록의 다음 이야기는 그의 포용력을 잘 보여준다.
대소신료와 한량기로 등이 국새로 받들고 태조의 저택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에 꽉 메어 있었다. 대사헌 민개가 홀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얼굴빛이 나타내고, 머리를 기울이고 말하지 않으므로 남은이 이를 쳐서 죽이고자 하니, 전하가 "의리상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힘써 이를 말렸다고 한다.
이 일은 1392년 7월 17일, 태조가 왕위에 오르던 날에 있었던 사건이다. 상황으로 보자면 민개는 이성계의 즉위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는데, 대개 이럴 경우 죽이기 쉽다. 하지만 이성꼐는 그를 포용하여 벼슬을 주고 신하로 두었다.
이성계의 포용력은 장수 시절부터 잘 알려져 있었는데, (동각잡기)의 다음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수있다.
고려조 말기에 군적에 올리지 않고 여러 장수가 각기 군사를 차지하여 부하로 삼으니, 이름하기를 패기라고 하였다. 대장중에 최영, 변안렬, 우인렬, 같은 이들이 위엄을 세우려고만 하여 그 막료나 사졸중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으면 욕하고 꾸짖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매질하여 죽는 자까지 있으니, 부하 중에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하지만 태조만이 홀로 성심으로 부하들을 예의로 대접하니 평생에 뒷말하는 자가 없어 장군의 부하들이 모두 태조에게 예속되기를 원하였다.
고려 말 당시 장수들이 이끌던 군대는 대부분 사병이었는데, 사실 이성계의 군대는 특별했다. 싸움 때면 지는 법이 없었고, 전투 중에 사상자도 극히 적었으며, 충섬심이 그 어느 부대보다도 높았다. 이는 모두 이성계의 온화한 품성에서 나오는 포용력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