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킹 프랑스를 정복한 헨리 5세의 죽음
1420년 5월 , 헨리5세는 샤를 6세와 트루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샤를 6세의 딸이자 왕세자 샤를의 누나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샤를 6세의 뒤를 잇는 프랑스 왕위계승자이자 프랑스 왕국의 섭정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병약한 샤를 6세가 죽으면 젊고 튼튼하고 강골인 헨리 5세가 프랑스의 국왕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샤를 6세는 헨리 5세보다 나이도 많고 병약했기 때문에 헨리 5세로서는 샤를 6세만 죽으면 자신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나라의 왕이 될거라고 여겼다. 비록 도팽 사를 (훌날의 승리왕 샤를)과 그를 지지하는 아르마냑파가 트루아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반항하고 있었지만, 프랑스 내의 다른 주요 파벌인 부르고뉴파는 헨리 5세의 즉위에 찬동하고 있었고 헨리 5세 본인이 이미 아쟁쿠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프랑스 포로들을 대부분 학살하여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커질 가능서을 미리 차단해 놓았기에 명분으로나 실력으로나 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명백한 운명처럼 보였다.
하지만 얼마 못가 아들 헨리 6세가 태어난 직후, 프랑스 원정을 지휘하다가 한참 젊은 나이에 전염병인 이질을 앓다가 죽었다.
헨리 5세는 파리로 급하게 돌아왔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으며 말에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마침내 그는 가마에 실려서 8월 뱅센 성에 도착했다. 그는 동생인 베드퍼드 공작을 불러 어린 헨리 6세의 후견인으로 임명하고 프랑스의 섭정직을 물려주었다.
헨리 5세는 유언으로 반드시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유지할 것과, 상황이 나빠진다면 노르망디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대의명분만이 프랑스에 정당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 비슷한 말을 덧붙였다. 그는 8월 31일,35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질은 전근대 군대의 가장 큰 적이었다. 아무리 관리를 한다 해도 전근대라는 환경에서 장기간 타지에 원정을 떠난 군대가 항상 위생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헨리 5세는 '전사 국왕'이라는 별명이 보여주듯이 병사들과 함께 최일선 진흙탕에서 구르는 타입의 지휘관이었고, 따라서 전염병의 위험에 그만큼 더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잉글랜드인들이 만든 역사를 다룬 작품과 영화들에서 멋지게 나오는 것과 정말로 대조적인 죽음, 그래서인지 죽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중세의 전쟁은 한번 이긴다고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현지 영주들에게 자신의 실질적인 힘을 보여주면서 항복을 받아내어야 오래 간다.
문제는 헨리 5세가 사망한 시점에 샤를 6세는 살아있었고, 헨리 6새는 아기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트루아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르마냑파의 목소리는 점차 힘을 얻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도팽 샤를은 자신이 정당한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부르고뉴파는 이러한 도팽 새를의 주장을 트루아 조약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비록 도팽 샤를이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했으나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왕이 대관식을 올렸던 랭스는 잉글랜드군 부르고뉴군의 점령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시농 성에서 골치를 썩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프랑스의 성처녀 잔 다르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결국 갑작스러운 헨리 5세의 죽음, 그리고 뒤를 이은 아들 헨리 6세의 어린 나이와 무능, 잔 다르크로부터 시작된 도팽측의 반격으로 인해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