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속 박정희의 오른팔 김재규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 이병헌이 연기한 김재규의 삶은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할수 있다.
1926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한 그는 5 ·16 군사정변 직후 군정 하에서 호남비료 사장을 역임하다, 제9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성한 뒤에는 건설부 장관, 중앙 정보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게다 동향 후배이자 육사동기인 그를 박정희 ㄷ대통령이 중용한 덕분이었다.
광복 이전에 일본군에 복무한 데다 교직에 선 경험까지 자신과 비슷했던 김재규를 박 대통령은 생전에 인간적으로 무척 아꼈다고 한다.김계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2006년 2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박대통령이 아무에게나 말을 안 놓는데, 김재규에게는 동생처럼 애기했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그뿐만아니라 10·26이 벌어졌던 1979년, 그는 권력의 핵심 중추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고 이런 이력만 놓고 본다면 그는 유신의 단물을 함께 빨아먹다 보스 뒤통수를 친 배신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것일까?
김재규가 재판과 변호인 접견 과정에서 자신의 거사 동기를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라고 일관되게 밝히고 있다.
(5·16혁명 이후 1972년 10월 유신 이전까지는 대한민국은 건국이념대로 자유민주주의를 해왔다. 그런데 10월 유신과 더불어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가 말살되었다. )
김재규는 1960년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며 우호적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이와 달리 10월 유신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평가를 보였다.
유신헌법은 '박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한 헌법'이며, 유신체제는 '민주,민권,자유,평등과 삼권분립을 말살하는 체제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 만큼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고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앞당기기 위해 거사를 벌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신체제를 종식시킬 방식이 대통령 살해 밖에 없었을까?
이에 대한 김재규의 답변도 비교적 일관된다. 그는 박 대통령 생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변화를 '건의'했다고 법정에서 밝혔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직후인 1977년 초반부터 유신체제에 대한 미국 내의 부정적인 여론을 들어 체제 개선을 요구했고, 1978년 초 다시 긴급 조치 해제를 건의했지만 대통령이 반대했다는 것이다.
김재규의 주장에 따르면, 특히 그가 대통령 눈밖에 난 것은 부마사태가 터지면서였으며
부마사태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의 10월 20일 마산 일대에 의수령이 선포된 사건을 말한다. 이사건으로 부산과 마산에서 각각 1058명, 505명이 연행됐으며 이중 125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부마사태 직후 민간인으로 위장해 현지를 다녀온 김재규는 학생뿐 아니라 일반 시민도 대거 시위에 가세한것을 보고 민심 이반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고 보괬다고 1심 법정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 박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커녕 반대효과만 났다고 하였는데 , 그의 진술을 이렇다
각하 말씀은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말에는 최인규와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대통령인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는냐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런일을 겪으면서 김재규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대통령 각하께서 계시는 한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가 회복되려면 대통령 각가 희생되지 않을수 없다.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