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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 하늘에 묻는다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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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 하늘에 묻는다 장영실

 

 

 

조선 세종때 활약한 과학기술자, 생몰년도가 언제인지 정확히 기록이 없어서, 이에 대한 것은 주로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장영실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세종 7년 장영실이 뇌물을 받아서 태형을 받은 내용이다. 

 

본관은 아산현, 기녀의 소생으로 동래현의 관노로 있었다. 그의 출생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가 소주, 항주 출신 중국인이라고 하며 기술력으로 미루어보면 혹 그가 원나라에서 망명한 기술자의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아산 장씨 종친회에서는 장영실이 아산 장씨 8세손인 장성휘의 아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특히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을 따르면 , 장영실의 아버지 세대는 5형제 5전판서 장성길, 장성발 , 장성휘, 장성미, 장성유로 유명한 영남 출신의 고려의 명문이었다가 고려  조선 변천기에 급격히 몰락한 집안이라 역사 드라마 제작가들이 주목할 수 있을 만한 떡밥을 제공하고 있다. 말이 쉬워 그러지 5형제가 다 과거를 붙은 것을 넘어 각부서 장관에 올랐다는 이야기다.

 

종친회 운영자는 이들 아버지 세대가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던 중 이방원을 위시한 인사가 휘두른 철퇴를 맞아 죽고, 장영실의 어머니가 관노가 되었다는 추리를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역사 드라마 한편이 될만한 매우 흥미로운 소재가 아닐 수 없는데, 장영실의 영은 아산 장씨 족보상의 항렬과 꼭 들어 맞는다. 그리고 나머지 4형제들은 어떻게 경북 산골에 숨어들어 무덤도 남겼고 그들의 후손도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데반해 , 장영실의 아버지는 장영실 이외에 알려진 후손이 없고, 그들의 무덤의 유무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한 사이언스 타임스에 따르면 장영실 집안은 원래 고려 때 귀화하여 아산군을 봉지로써 하사받은 장서 이후, 3세손인 장공수와 장승이 당시 무기 제조 기관이었던 군기시 책임자를 지내고, 5세손 장득분이 군기시 책임자 및 기상관청인 서운관의 책임자를 지내는 등 대대로 고려의 과학 기술 분야 고위직 책임자였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국방과학연구소장 및 기상청장을 지낸 셈이다. 이렇듯 그의 조상 대대로 세습되었던 직종이 암시하듯, 유전적으로 세습된 그의 재능 역시 타고났던 것 같다. 물론 과학적으로 진지하게 따지면 그런 재능이 유전 되었을 리는 없다. 그래도 정말 그런 집안이었다면 교육환상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위 내용은 단순히' 아산 장씨 집안에서 장영실이 자신들의 조상이고, 그 계보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 이상의 근거는 없다. 두 주장 모두 '아산 장씨 집안에서 나온 것이 근거'이니, 결국 아산장씨 종친회가 아산장씨 족보하고 싸우고 있는 형상인데, 이럴 경우는 둘 다 근거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금속제련,성곽 축조, 농기구, 무기 수리 등에 탁월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 전하는 이야기로는 동래현이 가뭄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수로를 파고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게 수차를 개발해내어 동래현에 들었던 가뭄을 해결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세종에게 보고 되어 한양으로 불려갔다고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연려실기술에 있는 기록이며 태종실록에서부터 장영실이 등장하며 그 실력을 인정받아 보호받았다고 한다.

 

 

당시 세종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유교적 정치 이상의 구현을 위한 차원에서 천문학과 천문기기 제작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장영실의 재능을 보고받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 나머지 그를 서울로 부른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 내용의 시기는 조선왕조 실록의 내용과 맞지 않다. 해당 내용에서는 윤사웅과 최천구를 고위 관료로 다루고 있으며 윤사웅 등이 혜성을 발견한 공로로 남원부사나 부평 부사 등에 임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해당 내용에 대해서도 불명이다. 무엇보다 세종5년에 호군에 임명 되었고, 이전에도 관직생활을 하고 있던 장영실이 이후 시점에야 면천된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다만 명나라에 가서 중국의 천문역법을 배우고 왔단는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세종 5년인 1423년, 세종은 장영실을 왕실의 물품을 제작, 수리하는 상의원의 별좌로 임명하려고 일단 허조와 조말생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허조는 반대하고 조말생은 찬성하였다. 이에 세종은 잠깐 결정을 미뤘다가 유정현 등 다른 대신들과 의논했는데, 여기서도 그를 등용하자는 결론이 나서 장영실은 무난히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백관들이 장영실을 등용하는 세종의 결정을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설은 실록의 기록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사실 백관들이 천민 운운하며 반재했을거란 생각자체가 굉장히 단편적인 생각이다. 성종때 구휼에 앞장선 노비가 면천을 받거나, 을며왜변때 면천을 내세워 노비들을 충군하거나, 임진왜란 발발후 창설된 훈련도감이 사노비들까지 받아들인데서 알수 있듯이 조선 조정은 필요만 있으면 노비를 면천시키고 포상 내려주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노비제도 자체를 고치는 것도 아니고 공있고, 국가의 기틀인 농업에 유용한 기술을 가진 관노 하나 면천시키는데 신료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또한 이때의 기록을 보면 그는 40대에 든 중년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기에, 몇몇 사람들은 이에 근거해 장영실이 주로 1380년대에 태어난 사람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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