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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와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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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와 스탈린

 

 

1924년 1월 21일 러시아 혁명을 응축시켜 몸속에 담고 있던 렌닌이 사망했다. 혁명운동과 사회주의 건설에 몸을 혹사한데다 1918년 사회혁명당 테러리스트에게 당한 총격의 휴유증이 겹쳐, 세차례나 뇌졸증으로 쓰러졌다가 마침내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1922년 12월 두번째로 쓰러져 누운 병상에서 레닌은 여러 편의 논문과 편지를 구술하여 소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명제로서, 공업화의 강력한 추진, 협동조합의 발전을 통한 농업의 사회화, 문화혁명, 모든 민족의 평등우호 관계, 노동자 계급의 지도적 역할과 노동도맹의 강화, 대중의 창조력 중시, 당과 대중의 긴밀한 결합, 집단토론을 통한 의사결정 등을 역설했다. 1923년 3월 사실상 폐인이 될 때까지 그는 마지막 불꽃을 사르며 혁명의 진전과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계속 쏟아냈다. 

 

 

이 시기에 구술한 것 중에 흔히 레닌의 '정치 유언'이라고 불리는 (대회에 보낸 편지)가 있다. 편지에서 그는 당 지도자들을 열거하면서 그 성격과 장단점을 묘사하고 그를 기초로 당의 단결과 중앙위원회의 확대강화 등을 제안한다. 이 편지는 1년 이상 묻혀 있다가 레닌이 죽은 후 중앙위원회에서 낭독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편지 공개 시의 물의를 우려한 몇몇 지도자들의 뜻에 따라 비밀리에 일부 대의원에게만 회람 됐고, 서기장 스탈린을 바꾸자는 레닌의 제안도 반트로츠키 투쟁에 밀려 조용히 거둬들여 졌다. 

 

편지에 묘사된 몇몇 지도자의 특징 묘사는 날카롭고도 흥미롭다.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그의 '비볼셰비즘'을 지적하고, '멘셔비즘' 재발 위험을 경고하면서, "당 중앙위원 중에서 가장 유능하나 자신과잉에 빠져 있고 사업을 순행정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 대해서는, 10월혁명 때 무장봉기를 반대한 것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물론 우연이 아니나, 트로츠키의 '비볼셰비즘'과 마찬가지로 이를 빌미로 그들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부하린은 '당내 최고의 이론가이나 변증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당시 공산당 내엔에는 크게 세 가지 조륙류가 있었다.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한 좌파는 세계혁명의 뒷받침 없이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성공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신경제정책도 어디까지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자본주의 방법을 이용하는 것일 뿐이므로, 그 추진과정에서 사회주이 건설을을 위한 계획화가 중시돼야 했다. 또한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농업은 어느 정도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트로츠키와는 별개로 행동하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부하린이 이끄는 우파도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세계혁명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는 데에는 생각을 같이했다. 다만 세계혁명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주의로 직접 이행하려 하기보다는 신경제 정책을 폭넓게 발달시켜 생산력을 높이는게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부하린은 신경제정책의 최대 이론가가 됐다. 

 

스탈린이 이끄는 중도파는 처음에는 자기 목소리를 갖지 않고 양자의 견해를 조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세계혁명의 기운이 점차 수그러들면서 거대한 영토와 인구와 자원을 갖고 있는 소비에트 연방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1924년 말,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가 정리된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이론투쟁에, 당과 중앙위원회와 서기국의 권한강화에 대한 반발이 덧붙여졌다. 당내에 심각한 대립이 발생한다. 

 

자신의 강력한 버팀목이였던 레닌이 쓰러진후 , 신참 볼셰비키 트로츠키는 당에서 점점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지자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여전했고, 논쟁 시의 매서운 칼날은 상대를 움츠러게 만들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당 지도자들이 트로츠키의 죄익 분파주의를 비판하는 데 힘을 모았다. 

 

트로츠키가 1923년 10월 중앙위원회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경제정책을 호되게 비판한 후 '서기국 관료주의'를 '당내 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 지지자 46인의 성명이 뒤따랐다. 당 중앙위는 곧 분파행동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기 며칠 전, 트로츠키가 요양차 카프카스로 떠난 뒤에 열린 당 협의회는 트로츠키를 맹공격하고 반대파를 탄핵했다. 용양지에서 레닌의 죽음을 맞은 트로츠키는 레닌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레닌이 죽은 후 레닌 입당으로 노동자들이 대거 공산당에 가입했다. 2년 사이에 당원이 35만에서 60만으로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당 기구를 관장하는 서기국의 권한이 강화되고 서기장 스탈타린에게 권력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레닌 이후의 지도자를 공공연히 자처하는 지노비예프와 달리 , 레닌의 충실한 제자를 자임하며 조용히 처신했다. 1924년 5월 제13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와 그 지지자들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트로츠키를 정치국에서 제명하자고 했으나, 스탈린이 반대하여 제명은 면했다. 

 

궁지에 몰린 트로츠키는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10월에 발간된 (10월의 교훈)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거기서 그는 레닌의 당부를 어기고, 카메네프와 '고참 볼셰비키'가 (4월 테제)에 저항한 것, 10월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무장봉기에 반대한한 것을 조소했다. 이것은 즉각 응수를 야기하여, 트로츠키가 레닌과 사사건건 대립하던 예 시절의 애기를 포함하여 그의 '멘셰비즘'과 '농민과소평가'가 연일 신문과 집회의 비판대에 올랐다. 1925년 3월 그는 마침내 군사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됐다. 

 

로츠키 공격의 선봉에 나선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공방과정에서 트로츠키와 두살사람의 과거는 적나라하게 까발려져 대중들에게 회자됐다. 전면에 나서지 않은 스탈린은 어부지리를 얻었다. 이후 몇 년 간의 당 역사는 스탈린의 권력장악 과정을 잘 보여준다. 먼저, 트로치키 축출에 앞장섰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넾네프가 일국사회주의와 신경제정책의 우경화에 반기를 들었다가 우파와 손잡은 스탈린에게 패배했다. 두사람은 1926년 이제 트로츠키와 손잡고 '좌익 반대파'를 이루어 한목소리를 내지만 시간을 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세 사람은 그후 당에서 축출됐다. 

 

1927년 곡물수매 위기가 빚어지면서, 스탈린은 좌선회하여 이전 좌파들의 주장을 대폭 받아들이고 농업의의 희생을 토대로 한 급속한 공업화에 착수한다. 1929~1930년 부하린 등의 우파마저 당의 의사결정기구에서 밀려나고 스탈린은 마침내 대적할 자 없는 최고지도자로 부상한다. 

 

스탈린이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당 권력의 강화와 당의 대중화 , 당내의 그의 지위에 힘입은 바 컸으나, 당시 상황에 가장 적합한 국가건설의 방향을 제시한 측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불투명한 세계혁명에 국가의 장래를 걸거나 흘러가는 물줄기의 방향을 인위적으로 틀려는 시도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스탈린은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비전과 그프로그램을 제시했고, 대중들은 거기에서 매진하여 달성할 목표를 발견했다. 

 

1927년 12월 27일 제15차 당대회는 '당의 일반노선으로부터의 이탈'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스탈린의 권위를 굳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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