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왕이자 나바라의 군주이다. 본명은 루이 디외도네이고, 공식 칭호는 루이 드 프랑스-나바르다. 그는 다섯 살 생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다. 아직 정치를 개인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서 이탈리아 추기경 쥘 마자랭이 1661년 죽을 때까지 사실상 역할을 대신하였다. 루이는 1715년 9월에 죽을 때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는데, 77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4일전이었다. 그의 치세 기간은 최종적으로 72년 3개월 18일으로 유럽의 군주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루이 14세는 세간에는 태양왕이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다.
루이 14세는 그의 전임자가 만든 중앙 집권화의 일을 계속 추진하여 프랑스의 지방에 끝까지 남아 있던 봉건제도의 잔재를 청소하고 수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갔다. 그의 성과를 방해한 것은 지방의 힘있는 귀족들로 많은 이들이 반란으로 일어났고, 그들 소수를 가리켜 프롱드라고 불리었다. 루이는 이들 힘있는 귀족들을 베르사유 궁전의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게 하면서 서서히 약화시켰고, 이를 통해 귀족들의 힘을 제어했다. 그 과 그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절대 군주의 전형으로 고찰되게 되었다.
또한 절대 군주의 자리를 다져 "짐이 곧 국가니라"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역사학계에서 이 말은 그의 정적들이나 볼테르가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루이 14세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로 하이힐을 최초로 신었고 귀족들이 그것을 따라하여 유행처럼 번졌다고 한다.
1715년 76살의 늙은이가 된 루이 14세는 72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 경제를 파탄시킨 자신의 정치행적에 대해 자각과 후회르 가져 임종을 맞기 직전에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어다."라는 간곡한 유언과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77세. 루이 14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국민들은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느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프랑스에는 혁명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여 74년 뒤인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