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함으로 인해 생을 마감한 영창대군
광해군 5년(1613) 4월 좌변포도대장 한희길이 문경새재에서 일어난 은상 강도살해사건의 범인 박응서를 체포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얼마후 박치의를 제외한 나머지 공법도 모두 잡혔는데 그 면면이 예사롭지 않았다. 심우영,서양갑,박치인,이경준, 김평손등 하나같이 명문대가 집안의 서자들로 서열에 대한 사회적 차별로 출셋길이 막힌 처지를 비관하다 의기투합해 자칭 강변칠우라는 사생계를 조직해 어울려 다니다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보고를 접한 이이첨은 즉시 한희길과 심의관 정항을 조용히 불러 일을 꾸밀 것을 사주했고, 이에 한희길이 먼저 잡힌 박응서를 회유, "김제남의 주도하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거짓고변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서양갑으로부터 거짓자백을 받아내 광해군의 친국까지 마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역모에 연루되었다고는 하나 이제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죄를 묻기에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지라 세상 여론도 전은론으로 들끓었고 광해군 자신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거칠게 없었던 이이첨 등이 집요하게 광해군을 다그쳐 마침내 광해군 5년 5월 30일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궁궐 밖 어느 민가에 구금시키는 데 성공했다.
광해군이 일단 한 발 양보하자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일을 일사천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창대군이 역모사건과 무관한 것은 광해군도 잘 알지만 그 사건을 기화로 돌이킬 수 없는 악연을 맺게 되었으니 장차 영창대군이 세상 물정을 알게 될 때가 되면 양심을 품고 무슨 일을 꾸밀지 장담할 수 없게 된 이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해 8월 2일 임해군 때 그랬던 것처럼 영창대군을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 시켰고 그 다음해인 광해군 6년(1914)2월 10일 영창대군은 증살이라는 참혹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되었다. 이때의 강화부사는 계축옥사 조작에 일조했던 정항이었고 위리안치된 영창대군의 감시책임자인 수직무장은 임해군 때 일개 수장으로 있다가 직접 임해군을 목졸라 죽인 이정표였다. 영창대군이 병사했다는 거짓보골고를 받은 광해군은 무참하게 살해당했을 어린 막내 동생에 대한 연민을 숨김업시 드러내며 임해군 때와 마찬가지로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지시했다.
인목왕후 역시 고역을 치러야 했다. 그녀는 사실상 대비전에 감금된 채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슴을 쥐어뜯는 아픔에 몸부림치며 통곡했지만 이미 벌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제는 인목왕후와 철천지원수가 된 광해군은 인목왕후를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 자리에 계속 앉혀놓을 수가 없었고 여론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광해군 10년(1618) 1월 후궁격인 서궁으로 강등시킨 뒤 유폐시켰다. 광해군 15년(1613)3월 13일에 피붙이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제주에 유배되어 간신히 연명하고 있던 친어머니 노씨 부인과, 죽었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리고서 절에 의탁한 덕분에 살아남았던 조카 한명, 그리고 친딸 정명공주뿐이었다.
인조 10년(1632)6월 28일 인목왕후가 그의 한 많은 삶을 되돌아보며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지 말아라"는 유언을 친정집에 서신으로 보내고 눈을 감았는데 그 이후로 연안 김씨는 구한말 연안 김씨 집안의 김덕수가 조선왕실의 마지막 왕자 가운데 한사람인 의친왕과 혼인할 때까지 왕실 사람과는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