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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비선실세 김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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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비선실세 김개시

 

 

 

조선 중기인 선조, 광해군 때의 유명한 궁녀, 개시의 시(屎)가 똥 시 자이기 때문에 실제 이름은 김개똥이었을 것으로 흔히들 생각하지만, 계축일기에서는 '가히'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또 연려실기술과 공사견문록 등에는 그녀의 이름이 각각 '개희(介姬), 가히(可䐖)'라도고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그녀의 이름 개시는 기존에 흔히 알려져 있는 개똥이가 아니라 가히의 음차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5대 요부라 불리는 인물 중 하나로, 나이가 차서도 얼굴이 펴지 않았다. 즉 못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천민의 딸이었지만 선조 때 광해군의 궁녀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가 선조의 궁녀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이 때문에 광해군과 선조의 나쁜 관계를 잘 중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가 광해군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영창 대군을 세자로 바꾸려고 하는 상황에서 광해군을 김개시가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선조가 급사한 후 광해군이 왕이 되자 김개시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게 된다. 덕택에 국정에 관여하여,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거의 후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지위는 상궁에 머물렀다. 권력을 잡고 난 이후 김개시는 관직을 돈을 받고 파는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큰 비리를 저질렀고, 윤선도, 이회,등이 여러번 상소하여 논핵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이 유배되었다. 심지어 광해군 치세 말기에는 광해군에게 모반의 징조가 있다는 상소가 여러번 올라왔었는데, 김개시가 그럴 리가 없다고 광해군을 안심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김개시가 반정 세력과 내통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결국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김개시는 반정군에 잡혀 참수 되었다. 

 

김개시가 선조에게 이미 승은을 입어 특별 상궁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광해군이 그녀를 총애하면서도 그녀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지 못한 이유가 이때문이라는 것, 이게 사실이라면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와 관계를 맞은 셈이다. 야사에도 김개시를 침실로 들이려던 광해군에게 나이 든 궁녀가" 개시는 선조 대왕의 은혜를 입었다"라고 간언하자, 광해군의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드러났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광해군의 영창대군 폐위 및 참살과 인목대비 유폐를 그린 계축일기에선 중간 보스급 악녀 캐릭터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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