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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들에 나오는 한명회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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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칠삭둥이 인물, 7달 만에 태어났으며 배 위에 별 모양의 점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 태어났을 땐, 당연히 칠삭둥이답게 사람의 형체마저 갖추지 못해 부모는 이 아이의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다고 한다. 그래도 살아서 꿈틀대기에 차마 버리지는 못해서 유모로 내정 되어있던 종이 몰래 이불을 둘둘 말아 따뜻한 방에 뒀다. 놀랍게도 아기는 죽지 않고 잘 자랐다. 몇년이 지나 사람의 모양새를 다 갖춘 뒤에야 비로소 유모는 집안 어른들에게 한명회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보통 이렇게 조산하여 태어난 아기들은 일찍 죽거나 건강이 좋지 못한데, 기적적으로 건강하게 컸다고 한다.

 

 

집안은 명문 집안인데 7대조 한강, 6대조 한사기, 5대조 한악, 고조 할아버지 한공의, 증조 할아버지 한수 등은 고려사 열전에도 입전된, 고려 말기 매우 유력한 정치적 인물들이었다. 특히 한수는 고려 공민왕 대 정치가이며 대학자였다. 학문 실력 및 과거 급제 연령으로 치자면 목은 이색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워낙 이색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인지도가 덜한 것도 있다. 할아버지인 한상질은 명나라에 가서 조선 국호를 허락받은 사람이며 한상질의 동생이자 한명회의 증조부인 한상경은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요컨대 사극에서 초년기에 별 볼일 없게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나름대로 금수저 출신.

 

젊은 시절에는 다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한상경에게 갔다고 했으니,아무래도 돈보다는 과거에 합격을 못해서 안습이라는 말이 나오는거 같다한 나날을 보낸 인물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40세까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아무래도 소위 말하는 공부머리와 잔머리가 따로 노는 인물이었는지 번번이 낙방했다. 결국 음보로 관직에 오르면 제 아무리 명망있는 가문이더라도 말단의 자리밖에 못 오르는 데다가 차별로 심했다. 개성에 있는 태조가 왕이 되기 전 살던 집인 경덕궁의 관리직을 맡았다. 이때 개성에 와서 벼슬하는 서울 출신 사람들끼리 '송도계'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는데, 한명회가 이 자리에서 가입을 희망했으나 말단직에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단순 거절 정도가 아니라"경덕 궁직도 벼슬이냐?"라고 한바탕 비웃음을 당해 아주 개망신을 당했다. 그러나 세종과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그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한다. 

 

과거 공부 때부터 친했던 권람의 추천으로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던 수양대군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참모가 되어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많은 깡패 무뢰배들을 포섭하고 홍달손을 비롯한 무장들을 끌여들었으며 수양대군의 정적인 김종서와 안평대군 일파의 정보를 수집, 마침내 세조가 즉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계유정난의 주역으로 공신 반열에 오르면서 일약 인생역전에 성공한다. 또 수양대군이 무사들을 불러놓고 거사를 종용하자 무사들의 의견이 서로 분분하게 갈라져서 생각보다 호응이 신통치 않았다. 세조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상황,이때 한명회가 "길가에 지으려면 3년이 지나도록 다 짓지 못합니다."라면서 결단을 촉구했고 홍윤성도 "군사를 내어 적을 치는데 가장 큰 문제가 결단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라고 거들었고 이에 수양대군이 "죽고 사는건 하늘에 달렸다. 떠날 자는 떠나고 따를 자는 따라라."라고 외치고 김종서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이는 세조의 결단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수있다.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움직임을 간파한 것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별운검을 폐하여 사육신의 계획을 좌절시켜 세조의 목숨을 구했다.이런 지대한 공 때문에 세조는 그를 "나의 장량이다."라고 평가했다. 이후 왕실에 두 딸을 시집보내고 정승이 되면서 조선 최강의 권력자로서 권세를 휘둘렀다. 세조 사후 예종,성종 초반까지 그 권세가 계속되었다. 

 

그의 권세가 어찌나 막강했는지 대간들이 그를 비판하지 못했고, 사간원의 간원 한명이 한명회가 몸담고 있던 원상제 폐지가 권해진 적이 있었는데 다른 대간들이 "너 미쳤냐? 원상제가 얼마나 좋은 제돈데 왜없애? 왜 네놈이 멋대로 한 일 때문에 우리까지 피 봐야 하는 거냐고?"라고 몰아 세웠고 대사간까지 "죽기 싫으면 당장 철회해라."라고 협박했는데 이 과정이 공개되면서 사간원이 죄다 갈려버리는 망신살스러운 사태까지 있었다. 심지어 예종 때는 왕도 못보는 실록의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들이 대신들의 비행을 적기가 두려워 이미 제출된 사초를 빼돌려 대신들의 허물을 감추는 식으로 수정하다가 들켜서 목이 달아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성종에게 시집보낸 막내딸 공혜왕후가 후사 없이 요절하고, 성종이 장성하면서 그의 권세도 수그러진다. 특히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기 전에 성종의 부탁으로 정희왕후에게 "대비마마께서 물러나시면 우리가 물안해서 술 한잔 도 못한다니까요."라면서 상당히 궁지에 몰렸다. 대간의 탄핵이 시작되면서 결국 한명회는 좌의정 직에서 물러나 보통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후에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와중에  생겼던 압구정동 사건으로 직첩이 거둬지는 수모를 당했으나. 그것 이외에는 쓸쓸하긴 해도 영화롭게 살다가 73세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뒤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덤이 파해쳐졌고 시신의 목이 베어져 해골이 길바닥에 내걸리는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그의 사후는 비참했다. 

 

정실 부인 사이에 한보라는 아들이 있는데 한보는 연산군 때 갑자기 사화에 연루되어서 처형될뻔 했으나 무사히 살아남아 중종 때 자연사했다. 한보의 장남인 한경기라는 인물은 젊은 나이에 '여자를 두려워하는 병'에 걸려서 여성들과 전혀 접촉하지 못하는 바람에 후손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그러나 한명회의 가문은 측실부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이 많고, 한보의 아들들도 많아서 현재 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2013년엔 한명회의 17대손인 한모씨가 자신의 조상인 한명회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모 언론인을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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