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참패 스당 전투
1870년 8월 말, 프랑스 샬롱의 병사 8만 5,000명이 거대한 분지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분지 한가운데로 뫼즈 강이 흐르고 그 위로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도시 스당이 있었으나, 아무도 경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프랑스 진영을 향하고 있는 700대 이상의 프로이센 대포가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이 익히 그 위력을 경험한 바 있는 고속 사격 크루프 6파운드와 24파운드형 대포였다.
프로이센군은 자신들이 '원형 전투'라고 부르는 전략을 자주 구사했는데, 바로 그 한가운데 프랑스군이 놓여 있었다. 프랑스의 오귀트 뒤크로 장군은 지휘관인 마크마옹에게 '우리는 요강 안에 앉아 있고, 똥물을 뒤집어 쓰기 직전이다' 라는 비유로 상황을 보고 했으며 다른 장소를 찾아 보라고 제의했다.
절망적인 상황에 합류한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야전 지휘관 대부분이 그랬듯이 소극적이고 우둔하고 무능했다. 결국 프랑스 제국을 영원히 침몰시킬 전투가 벌어졌다.
프로이센군은 8월 내내 프랑스군을 상대로 뛰어난 전략을 펼쳐 연승을 거두었고, 프랑스는 어지럽게 퇴각했다. 나폴레옹 3세는 나이많고 위엄 있는 군인 아쉴 바젠 원수를 프랑스 총사련관으로 임명했지만, 바젠은 느리고 우유부단했다. 그결과, 군전체가 요새 도시 메츠에 갇힌 채 프로이센군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이는 프랑스에 엄청난 타격이었고, 바젠은 거의 17만 명의 병사를 데리고 있었고, 나폴레옹과 마크 마옹은 그를 구하기 위해 9만 명 이상의 병력을 모아 샬롱군을 새로 조직했다. 샬롱군은 벨기에와의 국경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해 전선의 왼쪽 날개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는 전략적이라기보다 애국심에한 공격이었다.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은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보고는 프로이센 2개 군이 메츠를 계속 포위하도록 남겨둔 채, 다른 2개 군을 북쪽으로 이동한 부대는 8월 30일, 뷰몽에서 프랑스군을 따라잡았다. 짧지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프랑스는 5,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스당으로 퇴각한다.
나폴레옹 3세와 마크마옹은 그곳에서 쉬면서 부대를 재건하고 탄약을 보충한 후, 다시 공격에 나서려고 했다. 그들은 병사들이 오랜 행군으로 지쳐 있음을 간과한 데다 프로이센군의 빠른 움직임 역시 예측하지 못했다.
프로이센군은 신속히 전진하여 스당에 머물던 프랑스군을 포위해버렸다. 프랑스군은 포위되었어도 맹렬히 맞섰다.
흩어져 있던 프랑스 병사들이 스당 주변의 도살장으로 몰리면서 점점 더 많은 크루프 대포가 불을 뿜었다. 그것은 대학살이었고 프랑스군은 숨을 곳이 없었다.
탈출구도 없고 상황도 절망적임을 깨달은 나폴레옹 3세는 백기를 든 신하를 보내 빌헬름 1세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나는 병사들과 함께 죽는 데에 실패했소. 이제 남은 선택은 폐하의 손에 내 칼을 넘기는 것뿐이오.'
피비린내 나는 그 하루 사이에 프랑스 제국이 사라지고, 독일이 국가로 탄생하는 순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