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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세조와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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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세조와 한명회

 

 

 

조선 제 7대 국왕인 수양대군 세조와 그의 책사 한명회의 일생을 살펴 보자 

수양대군 세조는 1417년 태어나 1468년 51세의 나이에 나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재위 기간은 1455년 38세부터 1468년 51세까지다. 그는 아버지인 세종과 형인 문종이 왕으로 재위시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문종이 1452년 38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11세의 나이로 조선 6대 왕으로 즉위하자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수양대군의 나이는 35세 피끓는 나이였다. 1452년 수양의 책사인 권람이 한명회를 수양에게 소개한다. 

 

 

당시 세력을 모으던 수양의 동생 안평대군의 책사인 이현로도 한명회를 안평에게 추천했으나 한명회가 이를 거부하고 수양편으로 돌아선다. 책사 한명회는 정보전을 주장하고 정보 수집에 총력을 기운다. 반대편 세력인 안평대군,김종서, 황보인등도 세력을 모으는데 이들은 결국 서로 상대방의 거사일을 알아낸다.

 

거사는 정보전이고 속도전이다. 결정했으면 과감히 신속히 실행해야 한다. 줄리어스 시저의 로마군은 결정했으면 밤을 새워 신속히 공격하고 이동한다. 결정적인 것은 시간이다. 머뭇거리고 연기하다가 망한 사례가 많다. 

이때 수양이 결정하고 말한다. 

"적들이 알앗드라도 그들이 회의하는데 3일, 계획하는데 3일, 약속하는데 3일이 소요되 전체 9일 이상 소요될 것이다. 우리는 그 시간안에 처리하면 된다. 입조심하고 기밀을 유지하라. 말이 나오면 사람들이 모르더라도 귀신이 알게 되고 귀신이 앎알면 결국 사람이 알게 된다."

 

당시 그들은 권람의 정자인 남산 청학동 후조당에 모여 거사를 논의했는데 청학동은 남산의 북쪽에 위치한다. 지금금의 한옥마을이 있는 곳이고 충무로역에서 가깝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지리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여기 청한동은 서울이다. 청학동은 남산에서 가장 으슥한 골짜기다. 한양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곳 5경에는 청학동, 삼청동,인왕동,백운동,쌍계동이 있다.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고 수양이 실세인 김종서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그는 영의정으로 취임하고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겸임하고 병권과 정권을 모두 장악한다. 그는 단종을 섭정하고 그의 측근으로는 권람, 한명회등과 집현전 학사들인 신숙주, 정창손, 정인지, 김질, 홍달손이 있다. 

 

 

1455년 그는 15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양도받고 왕이 된다. 단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이후 3년간 단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만든다.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는 유배된다.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한다.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 환영식에서 별운검으로 지명된 성상문의 아버지인 무신 성승과 유응부가 한명회의 저지로 행사장으로 못 들어간다. 유응부는 세종, 문종이 총애하던 무신으로 중추원 동지사였다. 별운검은 특별행사때 국왕을 좌우로 경호하는 2품 이상의 무인이다. 

 

1457년 단종복위 운동과 관련하여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한후 영월로 귀양 보내고 이에 연루된 친동생 금성대군을 죽인다. 

 

세조의 책사인 한명회는 사육신을 적발 처단했으며 기존의 왕권 우위의 조정을 신권우위로 변경한다. 계유정난시 기회 한명회 , 실행 권람, 행동은 홍달손이 했는데 이들은 1등 공신의 맨 끝에 위치한다. 한명회는 영의정이 되고 인맥관리에 성공한다. 늘 사람을 가까이 하면서 심복을 길러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세조의 손자인 성종 즉위시 조정대신의 90%가 한명회 사람이었다. 

 

그는 단종복위 운동을 정확히 포착해서 위험을 제거했다. 성삼문은 단종복위 운동에서 거사를 연기하는등 결정적인 실기한 책임이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일을 망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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